손주영을 작가이자 기획자로 설명하면, 그가 움직이는 방식을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손주영은 전시에 방문하고, 지킴이를, 설치를, 영상 기록을 하고, 전시와 전시 경험에 관한 글을 쓰기도 한다. 그 외에도 손이 닿는 일, 기회가 맞는 일을 해 왔다. 그는 씬의 곳곳에 항상 있었다. «상태참조», «수정사항», «굿-즈»(공동 기획), «취미관», «더스크랩», 그리고 도쿄에서 열렸던 «신생공간»전까지, 신생공간에서 일어난 집단적인 행사에 두루 참여했고, 2013년부터 OC 프로젝트를 이어오고 있다.
주영 씨가 생각하는 ‘일’이라는 것의 범주가 궁금해요. 포지션을 딱 정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평정심이 있어 보여요.
손주영: 어떤 포지셔닝을 해야겠다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게, 여러 가지 하지만 내가 딱 그걸 하는 사람인가 하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포지셔닝을 한다고 해도 돈이 안 되니까 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그냥 열어놓죠. ‘손주영은 뭐든 한다’라고 사람들이 알고 있어야 일을 주고···. 그 덕에 내가 이걸 계속하게 되는 거죠. 나만 내가 누군지 알면 됐지 하는 생각이에요.
보통은 하나를 하게 되면 그 방향으로 더 마음이 커지기도 하잖아요. 이번엔 글이 이랬으니, 다음은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든지. 그런데 주영 씨를 보면, 그때그때 다른 일을 하면서도 산뜻한 태도가 계속되는 게 신기하거든요.
손주영: 저는 너무 힘든 걸 안 하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사실 사업자 내고 전시 영상 기록 쪽으로 더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아침에 SLR 렌트에 가서 장비를 빌려 보면 ‘아 안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인력 시장 같은 느낌이 들어서. 여러 가지 일을 한다지만 이젠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 주로 뽑히는 일들도 있기도 해요.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도, 나중에 보면 꾸준히 뭔가를 하고 있어요. 자기 선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했다는 느낌이에요. 어떻게 보면 야망이 없어 보이는데, 꼭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손주영: 야망이라는 건 한 2015년 정도에 거의 없어졌어요.
2015년요? «굿-즈» 이후 주변 작가들이 모두 야망을 펼치기 시작한 때잖아요.
손주영: 저한테 ‘야망’이라고 하면···주변에 야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가진 못난 면을 보면서, 저렇게 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욕심을 안 가져야 한다고. 2015년에도 이미 그랬지만, 2016년에 어시스턴트 일 했을 때, 갑작스러운 해고를 당한 후 현타가 좀 세게 왔던 것도 있고요. 두 달 정도 되게 우울했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것도 지나고 나서는 별 생각 안 하고. 저는 33살부터 제가 마흔이 된 것 같았어요.
사실 이런 이야기를 건너서 많이 들어요. 누가 저분은 뭐 하는 분이냐 물어봤다고.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고. 아무튼 저는 내가 그냥 하나로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는 전시 영상 기록 쪽이 나을 거 같아요.
자신을 평온한 상태로 두면서, 전시 보고 작은 일도 하다가, ‘이렇게 하면 재밌겠는데’ 하는 작은 기획이나 작업을 하고···. 저희 예전 기억부터 조금씩 돌아볼까 해요. 사실 처음 만난 지점이 이젠 기억 안 나거든요.
손주영: 저랑 최진석, 김동희 작가랑 공동 기획한 ‘공간1(2012)’ 때 정석 씨가 메일을 보냈었어요. 저흰 그때 정석 씨 이름을 처음 알았어요. 아마 한번 만나자고 했던 것 같은데 ‘우리는 이 사람은 모르는 사람인데 왜 보자고 할까?’, ‘우리 모르는 사람인데 보지 말자’ 그랬죠. 그래서 그때 안 봤어요. 아마 오픈베타공간 반지하 B½F에서 한진 작가 «오르가즈믹 스크랩»(2014) 전시 중에 처음 만나 대화했을 거예요.
십년도 넘었네요. 공간1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손주영: 얘기하자면 긴데, 김동희랑 최진석은 미술학원 입시 동기고요. 그 둘과 저, 이승찬 작가까지 넷이서 작업 이야기하는 주간 모임을 학부 때 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작업 이야기도 했지만, 사실 그게 노는 거기도 한 거 같아요. 그러다가 최진석이 미국에 교환학생을 다녀왔는데, 학생들이 아무 공간 빌려서 전시하고 그런 걸 봤다고, 재밌더란 거예요. 예전엔 그런 식으로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서울에 많지 않았잖아요. 우리도 그런 걸 해보자고 했어요. 이승찬은 학업이 남아서 빠졌던 것 같고, 나머지 셋이서 기획하게 된 거죠.
참여하신 단체전엔 «게걸음»(2012)도 있네요. 여기 조현석, 노은주 작가의 ‹생존자 라디오›도, 김동희/문세린 작가 팀도 있군요. ‹생존자 라디오› 홍보 보고서 기뻤던 기억이 나요. 고립되어서 작업하고 있었는데, 아 우리만 이런 상태인 게 아니구나 하고···.
손주영: 반 농담이긴 한데 학부 당시 회화과 다니며 배운 게 진짜 캔버스 짜는 것밖에 없거든요.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도 보려고 해도 뭘 알아야 보잖아요. 제 학부 때는, 2005~7년까지 회화 시장이 잘 되었었잖아요. 다들 하나만 잘 그리면 된다고 할 때였거든요. 소위 블루칩 작가들.
그때 그랬죠. 학생들 다 그림 그리고. 유광 바니시 반짝거리고.
손주영: 근데 갑자기 시장 상황이 반전되고. 그럼, 뭘 하지 하고 주변을 보면, 백경호나 박정혜 작가 같은 이들이 있었어요. 그림은 저런 사람들이 그려야 되는 거 아닌가 싶은 사람들이죠. 제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더 개념적으로 접근하는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것도 시간 지나니까 별로다 싶고. 대학원 가서도 쓱 지나가다가, 신생공간 시기가 시작된 거죠.
OC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한 거예요? 이건 장기 프로젝트인데, 기획전으로 이어지기도 했고요.
손주영: 2013년에 제가 캔버스 짜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소셜미디어에 종종 올리던 ‘캔버스 짜드립니다’ 봤어요.

손주영: 캔버스 짜는 일을 계속하고 있으니까, 자투리 천이 계속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그 모양대로 캔버스를 짜면 ‘그게 그냥 내 그림이겠구나’라고 생각을 한 거죠. 좀 자조적인 것도 있고 여러 의미로. 어쨌든 그게 내 그림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농담 같지만, 만들어 놓으면 긴 캔버스가 예쁘거든요. 처음엔 만들어만 놨어요. 그러다가 첫 «취미관»(2017)에서 기획팀이 저한테 유리 진열장 하나를 맡으라고 했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딱 떠오르는 게 그 캔버스였어요. 진열장을 나한테 주어진 전시장이라고 생각하고, 캔버스도 어떤 공간이고. 거기에 사람들을 초대해야겠다.
그러면 작품에 크레딧이나 판매 시의 정산은 어떻게 해요?
손주영: 계약은 내가 일단 내 작업을 너한테 준다. 거기다 당신이 작업을 한다. 만약에 작품이 팔릴 경우, 나누는 비율은 제 건 거의 그냥 캔버스 제작비 플러스 인건비 정도고요. 기본적으로 그린 사람이 가지고 가는 거죠. 캡션에는 OC 프로젝트에 맞는 크레딧을 표기하고요.
그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을까요?

손주영: 노은주 작가와 협업한 작업 중에 2020년에 제작된 ‹OC-긴 형태›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게 판매가 됐어요. 어떤 곳에 어떻게 걸려 있을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다른 생각들로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작품이 생각나네요.
예쁘네요. 옆면도 꼼꼼히···OC 프로젝트 결과물 은근히 재밌어요. 2024년엔 인터럼에서 «Open Corridor»란 이름의 기획전도 열렸어요.
손주영: 인터럼에서 OC로 전시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거절하기로 마음먹고 만났어요. 그런데 이야기하다 보니까 재밌을 수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처음엔 제 개인전으로 초대하려는 거였는데, 전 혼자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몇 년 동안 작업을 안 하고 있었고, 전 누군지도 모르는 대상한테 갑자기 내 작업에 참여해달라 제안하는 게 여러모로 안 맞더라고요. 그래서 박정우와 같이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어요.
참여 작가에 대해서 먼저 서로 대화를 해보고, 추후에 그들을 위한 제안을 짜자. 둘이서 하니 (이전과 달리) 작가들에게 구체적인 제안서를 써서 진행했어요. 우리가 당신 그림에서 어떤 걸 봤고, 뭘 염두하고 해보면 좋겠다는 식으로요. 저는 한편으로는 «Open Corridor»가 박정우가 만든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그가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면에서.
«Open Corridor» 리플렛에는 재밌는 글을 써두셨어요. 여고괴담 시리즈의 영어 제목 ‘속삭이는 복도’, 그 유명한 복도를 ‘여러 사람이 오가는 공간인 동시에, 그 시간이 쌓여 스스로 속삭이는 공간’으로 말한 부분이나, ‘긴 가위로 크기에 맞춰 (캔버스) 천을 잘라내다가 문득, 이건 복도를 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하는 부분요.

손주영: 복도, 골목에 대해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복도나 골목은 뭔가가 구획되고 남은 것인데요. 어떻게 보면 중요하지 않은 부분인데, 그게 또 통로가 되는 느낌이에요. 말로 설명하기는 좀 어려워요. 학부 때 바퀴벌레를 가지고 작업한 것이나, 실종자들을 그린 적도 있었어요. 그런 것들, 내가 관심 가져온 것들이 복도와 관련되어 생각이 되는 거예요. 구획되고 남은 것들. 미술이랑 건축이 나누어지기 전의 어떤 것에 관해 관심이 좀 있는 거 같아요.
구획이라는 게 폭력적일 수도 있고, 반면에 상식적인 걸 수도 있어요. 복도는 그것의 잔여라는 생각을 해요. 왜 나를 자투리에 투영하려고 했을까? 여기는 캔버스가 될 거고 될 거고 이건 남는 부분이라면, 그 천을 자르면서 내가 복도를 내는 것 같다고 생각했죠. 전시 기획하면서 박정우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버리는 천을 딱 잘라내면서 그걸 공간으로 만드는 걸 생각하면 재밌네요. 또 그 공간이(캔버스가) 서로 다른 작가에게 갔다가, 한 장소에서 만나기도 하고요.
손주영: 전 박정우에게 크레딧을 줄 수밖에 없어요. 서로 처음 대화한 것도 취미관에서 지킴이 할 때, 관객으로 방문한 박정우가 OC에 대해서 질문했었거든요. ‘저 사람 왜 이렇게 진지한 질문을 하지?’가 첫인상이었어요. 내 작업을 지지하는 다른 작업이 있을 수 있잖아요. 꼭 내 동료가 아니더라도, 먼 사람이더라도 어떤 존재가,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의 다른 다리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서 저한테 제안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 박정우의 작업이기도 한 거죠. 그렇게 느꼈을 때 되게 좋았어요.
그런 만남 흔치 않아요.
손주영: 그리고 둘이 너무 다르거든요. 나는 좀 신내림 받아야지 얘기하는···작가한테 빙의해서 생각하려고 하는 편이고 박정우는 엄청 분석적으로 얘기해요. 인터페이스나 매체에 관점을 두기도 하고요. 회화사-미술사를 따라서 생각하고.


앞서 미술이랑 건축이 나누어지기 전의 어떤 것에 대한 관심이 있다고 했는데.
손주영: 과거 예술이라면 당연히 해왔던 것들···감정적인 거나 스피리추얼한 것. 다른 분야의 예술은 여전히 그런 걸 하는데, 미술 전시에선 잘 없잖아요. 건축이랑 미술이랑 나누어지기 전이란 게 결국 종교(화) 같은 걸 이야기한 건데, 그러니까···영성이죠. 저는 1년에 한 번씩 엄마 제사로 성당에 가요. 성경 구절 읽고 예수의 몸으로 상징되는 걸 같이 나눠 먹고. 그러다가 다시 그냥 일상으로 돌아가잖아요. 그런 종교의 형식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2025년 초에 최윤희 작가 오픈 스튜디오를 기획했었는데요. TINC에서 열린 전시 «Tuning In»을 영상 기록하러 갔다가, 거의 벽만 한 그림 3개가 있었죠. 최 작가에게 문득 벽화를 해보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어요. 그걸 기억하고 작년 연말에 갑자기 최 작가가 연락이 왔어요. 작업실 이사 하는데, 그전에 벽화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 어느 순간부턴 저한테 계속 그 과정을 공유하는 거예요. 그래서 같이 전시를 만들게 된 거죠.
구획되기 전, 나누어지기 전에 있던 것. 그런 장면을 떠올리면 무언가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아요. 왜인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있을 것 같고.
2025년 11월에 나눈 대화를 편집.

피아★방과후
그런데, 아이돌 <이달의 소녀>에 빠져 있으시죠. 전엔 몰랐거든요.
일 년 열두 달, 매일 밤 뜨는 달처럼 우리가 늘 마주하는 상징으로 엮은 이야기에는 종교적인 힘이 있어요. 유한한 시간 너머를 믿게 한달까요?

손주영
◖손주영의 추천 뮤직비디오◗
1. 이달의 소녀/츄 ‹Heart Attack›(2017) MV
츄를 모르시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누군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한국에 산다면 어떤 광고로든 마주했을 유명한 연예인이지요. 어쩌면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처음 접한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츄는 아이돌 그룹 ‘이달의 소녀’의 열한 번째 멤버입니다. 이달의 소녀는 한 달에 한 번씩 열두 명의 멤버가 각자 솔로로 데뷔하고, 이후에 팀을 이루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뮤직비디오는 열 번째 멤버인 이브를 열렬히 따르는 츄를 담고 있습니다. 동경과 사랑 혹은 집착을 오가는 이 모습은 ‘stan’의 어두운 면모를 잠시나마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둔갑시킵니다. 그래서인지 이 곡은 이달의 소녀 솔로 프로젝트 중에서도 각자의 문제로 케이팝에 빠지게 된 글로벌 팬들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습니다. 곡이 끝날 무렵, 츄는 창문을 통해 실내의 이브를 바라보는 성냥팔이 소녀가 되어 쓰러집니다. 멀리서 ‹The Carol›이 들려오고, 그 곡의 뮤직비디오에서와 같은 모습을 한 세 번째 멤버 하슬이 그녀를 깨우지만, 다시 일어난 츄는 마치 하슬이 귀신인 양 보지 못하고 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사라집니다. 왜 이 뮤직비디오의 티저 영상이 성탄절에 공개됐는지, 하슬이 ‹소년, 소녀(Let Me In)›에서 쏘는 새총과 이브가 츄에게 쏘는 사랑의 화살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이브가 먹는 붉은 사과와 츄가 먹는 푸른 사과가 어떻게 다르고, 왜 딸기를 먹은 츄는 결국 쓰러지는지 등 자세히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은 많지만, 지금은 참겠습니다.
2. 이달의 소녀/최리 ‹Love Cherry Motion›(2017) MV
세 단어로 구성된 곡의 제목은 마치 “문 크리스탈 파워”처럼 마법 소녀의 주문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곡의 멜로디는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보던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이사이의 브레이크 구간에서는 전혀 다른 곡이 되기도 하지만요. 이 뮤직비디오는 여덟 번째 멤버 최리가 바닷가에 혼자 당도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다음 장면에서 최리는 하슬과 네 번째 멤버 여진이 있는 곳으로 가, 그들과 즐겁게 지내다가 조각 케이크 위에 올라간 체리를 집어 먹고 쓰러집니다. 이때 음악은 1절 후렴에서 브레이크 구간으로 넘어가며 완전히 다른 사운드로 변모하지요. 2절이 시작되면, 최리는 외딴 건물에서 눈을 뜹니다. 밖으로 나가 초원에 놓인 열두 개의 거울을 통해 위와 아래가 뒤집힌 반사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이 뮤직비디오의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이 뮤직비디오를 백 번쯤 봤을 때, 문득 왜 첫 장면 이후로 바다가 등장하지 않는지에 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있는 곳이 바닷가 근처였다고 한다면, 굳이 야외 수영장에서 물놀이하는 장면이 나오는 게 이상하니까요. 의문이 풀린 건 레이디스 코드의 ‹The Rain›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나서였습니다. 바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비추고, 바다에 다다른 뒷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두 명의 멤버가 사망한 뒤, 세 명의 멤버가 발표한 레이디스 코드의 일련의 곡들은 어쩔 수 없이 상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같은 A & R(정병기), 같은 작곡가(황현), 같은 뮤직비디오 감독(디지페디)이 만든 영상에서 꼭 닮은 장면이 나온다는 건, 분명 의도가 있는 것이겠지요. 왜 브레이크 구간 장면은 실내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는지, 2절이 끝나고 브릿지 구간으로 넘어갈 때 여섯 번째 멤버 김립과 일곱 번째 멤버 진솔이 인도풍의 멜로디와 함께 등장하는지 등 자세히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은 많지만, 지금은 참겠습니다.
3. 이달의 소녀 ‹Hi High›(2018) MV
2016년 가을, 버스 정류장에서 첫 번째 멤버 희진의 데뷔 앨범 광고를 처음 봤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인스타그램 사용자가 많아지며 성행하던 아마추어 모델 화보 같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화보로 가장 유명했던 작가가 한참 논란에 오르기 시작하던 시기였으니 그럴 만도 했겠지요.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 발표된 이 뮤직비디오는 특정 장면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감독이 레퍼런스로 삼았다는 어린아이가 계단을 오르는 사진을 공개했지만, 해명이 되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그 장면 하나로 모든 것을 기각하기에, 열두 명의 소녀가 비로소 한 장소로 모이는 이 뮤직비디오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이들이 만나지 않는다면 ‹Butterfly›에서 전 세계의 소녀들과도 연결될 수 없었을 테고, 케이팝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순간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Hi High›는 독특한 가사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가장 유명한 건 마지막의 “김밥처럼 넌 만두처럼 달콤해”라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지만, “수능보다 더 사랑이란 잔인해”도 못지않게 독특하죠. 저는 이 가사가 윤상의 ‹달리기›를 둘러싼 후문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달리기›는 “bye bye bye bye”라는 가사로 끝나는데, 가장 마지막 ‘바이’에는 잔향이 남는데, 숨소리를 가득 머금은 탓에 자음이 잘 들리지 않아 얼핏 들으면 ‘바이’인지 ‘하이’인지 모호해집니다. ‹달리기›의 끝을 이어받은 ‹Hi High›의 도입부는 “You know, It’s been a long day. I haven’t seen you today. You’re somewhere. I’m sure.”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희진이 학교 옥상에서 건물 바깥으로 내달리며 공중에 떠 있는 상태로 뮤직비디오 끝이 나고요. 도입부 구절의 화자는 누구일까요. 희진은 떨어지고 있는 걸까요, 떠오르고 있는 걸까요.
4. ARTMS ‹Icarus›(2025, Cinematic Ver. ) MV
이달의 소녀를 기획한 A & R 정병기(Jaden Jeong)는 ‹Butterfly›가 수록된 [x x]를 끝으로 기획사 블록베리크리에이티브를 떠났습니다. 그가 제작하려던 발라드 앨범 [La Maison LOOΠΔ]는 티저 영상의 ‘delayed but someday’라는 문구가 무색하게 취소되어 버렸고요. 이달의 소녀는 1년간 활동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하슬은 건강상의 이유로 활동을 중단합니다. 비활동기에 열심히 올린 커버 댄스 영상이 화제가 된 덕에, 이후 두 개의 앨범은 SM엔터테인먼트의 대표였던 이수만이 제작하며 ‹So What›으로 첫 음악방송 1위를 하기도 했지요. 제가 이달의 소녀에 처음 빠져들게 되었을 때가 이즈음입니다. 하슬이 복귀하며 오랜만의 완전체 활동으로 기대를 모으던 앨범 [&]와 타이틀곡 ‹PTT(Paint The Town)›은 컴백 첫 주에 스태프 코로나19 확진 판정으로 인한 완전체 자가 격리 탓에 흐지부지 끝났고요. 이후 츄와 블록베리크리에이티브의 소송이 시작되고 이달의 소녀는 내리막을 걸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 급기야 회사는 츄를 방출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츄는 전속계약 무효 확인 소송에서 최종 승소했고, 다른 멤버들도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소송을 진행하며 뿔뿔이 흩어졌죠. 이런 과정은 어떤 팬들을 떠나가게 했지만, 어떤 팬들에게는 더욱 강력한 지지를 끌어내기도 했습니다. 아이돌은 그 자체로 트렌드를 반영하는 상품입니다. 대기업에서 나온 신인 그룹조차 잠깐의 영광을 누릴 뿐, 곧 과거가 되어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게 케이팝 산업입니다. 그러니 재결성된 중고 신인에게는 다른 전략이 필요합니다. ARTMS는 정병기가 대표로 있는 모드하우스 소속 그룹으로, 팀명은 NASA의 달 탐사 프로젝트 ‘아르테미스 계획’에서 따온 것입니다. 원래 이달의 소녀 멤버가 하나하나 모이는 프로젝트명이었으나, 현재는 멤버 중 다섯 명(희진, 하슬, 김립, 진솔, 최리)이 모인 그룹명으로 정착됐습니다. ARTMS는 이달의 소녀가 구축한 세계를 적극적으로 이어오면서도, 스스로 불완전함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시인함으로써 도리어 정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이 뮤직비디오는 다섯 명의 사라진 소녀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최리는 그 소녀들이 “TV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말하는데, 영상 속 수신되지 않는 TV의 스노우 노이즈는 8년 앞서 발표된 ‹Love Cherry Motion›에서도 볼 수 있었죠.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이을 수 있는 건, 디지페디와의 꾸준한 협업 덕분일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이달의 소녀의 ‘세계관’이 일종의 종교가 됐음을 잘 알고 그걸 드러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 역시 그 세계의 충실한 일부가 되려 하기에, 우리의 믿음도 영속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비교적 적은 예산이라는 조건에서 ‘업계 표준’과 뚜렷이 구분되는 걸작을 만들 수 있는 이유도 이 신앙에서 비롯하는 것이겠지요. 많은 케이팝 그룹이 세계관을 내세웠지만, 대부분 데뷔 초의 홍보 전략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작동하는 유일한 세계관은 ‘LOOΠΔverse’ 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각종 상징과 서사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연결하는 구조입니다. 제가 이달의 소녀의 작품을 보고 또 보는 이유는, 부재로부터 출발해 시간을 거스르는 방법을 찾아 영원한 세계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15분에 달하는 이 뮤직비디오부터 시작하셔도 좋겠습니다. 어차피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니까요.
5. 청하 ‹Stay Tonight›(2020) MV
하지만 제 최애는 청하입니다. ‹Dream of You›와 ‹I’m ready›를 놓고 고민했지만, 가장 무대로 보고 싶은 곡을 추천해 드립니다. 이 뮤직비디오에는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 이후 잘 알려진 라치카 멤버들뿐만 아니라, 디바마을 주민들이 다수 출연하니 찾아보는 재미도 있겠습니다. 언젠가 청하의 첫 단독 콘서트가 열린다면 실제로 보실 수 있길 바랍니다. 무대에는 방송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게 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