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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후쿠시 치히로의 만화를 처음 접하는 이들을 위해

2020년 여름, 후쿠시 치히로의 만화책 6권을 살라미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했습니다. 이 대화는 당시 텀블벅에 후원자를 위해 공개했었던 내용입니다. 간혹 작가 인터뷰가 어디에 있느냐는 문의가 있어서 여기에 올려둡니다. 짧은 대화지만 그의 작업 방식과 일상, 아이디어 등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후쿠시 치히로 만화는 앞으로도 출간할 예정입니다. 최근엔 인터뷰에서 언급하는 동인 그룹 ‘5번가 맥’과 함께 이것저것 도모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후쿠시 치히로의 세계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Q. 여러 가지 이름으로 활동하시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본명인 후쿠시 치히로(福士千裕)를 사용하기도 하고 ‘카니(蚊に)’라고도 하고, ‘5번가맥(五番街マック)’이라는 그룹 활동도 하고 계시네요. 각각의 활동이 어떻게 이해되었으면 하시나요?

A. ‘카니(蚊に)*’는 벌써 10년 넘게 쓰고 있는 계정의 펜네임입니다. 그래서 온라인 상의 지인은 제 이름을 알고도 그냥 ‘카니’라고 부릅니다. 저도 그때그때 기분과 상황에 따라서 써요. 이름에 신경을 잘 안 쓰는 것 같아요. 그렇게 확실한 구별 없이 지내다 보니까 어느 쪽이 더 좋다는 기준도 없네요. 헷갈리시겠지만, 둘 중 편한 대로 불러주시면 감사해요. ‘5번가 맥도날드**’로는 2012년부터 동료 작가인 시와시와(しわしわ)와 함께 그림과 만화, 음악 등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카니 蚊に: 뜻은 모기/ 발음은 게(カニ)와도 같다.
**5번가맥 홈페이지: http://5bangaimac.web.fc2.com/

Q. 책 한 권을 위한 작업 기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궁금해요.

A. 동인지 판매 행사를 생각해서 책을 만들어요. 일정에 맞춰 제작 기간을 3개월 전부터 미리 잡고 집중적으로 작업합니다. 제가 다른 일을 동시에 못 해요. 그래서 시기를 정하고 한 번에 작업하는 게 성격에 맞아요. 아이디어가 여러 개 널려 있고 그것들을 끌어오는 것이랄까요. 떠오른 이미지를 한 페이지씩 그리고, 그리다가 생각이 계속 안 떠오르면 다른 페이지를 그려요. 페이지를 늘려가면서 예상한 수만큼 쌓이면 모든 페이지를 랜덤으로 섞고 재조합하면서 하나로 묶는 경우가 많아요.


Q. 동인활동을 언제부터 시작했나요? 메이저 만화가를 지향하시나요?

A. 첫 만화책 『천년과 천엔(せんねんとせんえん)』을 만든 2012년경부터 동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COMITIA에 ‘5번가 맥도날드’로 참여한 시기와 거의 같습니다. 저 역시 많은 사람에게 만화가 전달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주류 만화가가 되는 것은 목표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어릴 때부터 만화를 보고 만화가가 되는 꿈을 꿨어요. 꽤 힘들겠지만, 만화가는 꿈 같은 직업입니다. 읽는 사람의 범위도 꽤 넓고요. 만화를 발표하면서 저도 그렇고, 독자의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충족시켰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어요. 내 만화가 좋다는 피드백을 들을 때도 그렇고, 내가 재미있게 생각한 걸 흥미롭게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서로 행복하죠. 물론 아무도 내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해도, 저만 만족할 수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죠. 그런데 막상 현실에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마음의 양식 삼아 흐름에 맡겨 살아가고 있습니다.

*COMITIA: コミティア 일본에서 개최되는 동인 이벤트로, 연 4회 열리며, 1회에 2일간 열린다. 1984년 첫 개최, 2차 창작물 판매와 코스프레는 금지되어 있다. 순수 창작물만 판매 가능하다. 만화, 일러스트, 소설, 음악 CD, 게임, 핸드메이드 악세사리 등의 각종 굿즈 등을 다룬다

Q. 매 페이지에 다른 내용이 펼쳐지는 형식을 구상하게 된 건 언제인가요?

A. 첫 책 『천년과 천엔(せんねんとせんえん)』을 그린 시기부터 그랬어요. 특별히 계기가 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갑자기 그림의 끝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화 역시 여기서 끝낼 수 있겠다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책을 만든 이유는 그런 단편을 흩어진 채 보는 것보다 연속적인 상태로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전시회처럼 말이죠.

Q. 만들어내고 있는 만화들이 언젠가 하나의 장편이 될 거로 생각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작업을 평생에 걸친 게임적 사만화(사소설 私小説처럼)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A. 온 세상에 수많은 대상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요. 그 이야기들이 묶이면 대장편이 되는데, 그중 일부를 잘라서 그림으로 그리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그릴 것 같아요. 그림이 모자라서 더 많이 그려야겠다고 생각해요.


Q. 작품 속에 당신의 일상적 삶과 노동에서 오는 감정이 틈틈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돈키호테*에서 아르바이트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만화 속 어떤 장면에서는 그걸 상상하며 보게 되기도 했어요. 당신의 일상, 이를테면 친구와의 만남이나 근교 여행, 하루의 일과, 노동 등이 어떻게 작업에 반영되나요? ‘이런 건 만화에 반영해야지’하고 느끼는 때가 있는지? 대사는 어떻게 떠올리는지 궁금해요.

A. 물론 전혀 상관없는 내용도 들어가지만, 대사와 상황 설정은 일상의 여러 장면에서 힌트를 얻어서 발전시킨 게 많아요. 예를 들어, 보잘것없는 대화, 혼자 말하는 불평, YouTube 중계 동영상 등등. 어떤 상황에서 실제로는 못했던 말을 만화에서 말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의 대화를 가지고 와서 쓰기도 해요. 트위터에 안 올린 말이나 공책에 막 쓴 문장의 단편을 그대로 쓰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대부분은 그때그때 떠오른 내용입니다. 이미지와 말의 서랍에서 꺼낸, 일상의 단편과 좋아하는 모티프의 다양한 이미지가 결합하여, 요리되고 만화로 나옵니다.

*돈키호테 ドン・キホーテ: 일본의 잡화 체인점.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어지간한 식품과 생필품, 소품 등 다양한 물품을 취급한다. 돈펭(ドンペン)이라는 이름의 펭귄 마스코트를 쓰고 있다.

Q. 일반적으로, 소위 메이저 만화를 보면, 그림이 정보로써 고도로 기호화된 상징의 역할을 합니다. 당신의 만화는 그에 비하면 드로잉에 가까울 때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자연 풍경을 그린 몇몇 장면은 사생(寫生)하기도 하는지 궁금하게 만들어요.

A. 제가 그리는 만화는 독자를 잘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초기 만화는 특히 더 드로잉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만화는 중얼대는 말과도 같아요. 그런데 그림을 계속 그리면서 생각의 변화도 생기기 때문에, 전부 다 그렇다고 보기도 힘들어요. 최근 8년 동안 만화에 대한 생각도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새로 만든 작품을 통해서 보여 드리고 싶네요. 사실 그리면서 생각을 하다 보니까, 말로 설명할 게 딱히 없는 것 같아요.
사생(寫生)하는 일은 거의 없고, 다시 떠올리면서 그립니다. 디테일의 서랍에서 매번 꺼내어 화면상에 콜라주하는 것과 같아요. 풍경도 그렇고 캐릭터의 디테일도 그렇습니다. 그리면서 선이 시원하게 나오면 기쁘고, 그러면 더는 이성적으로 그리기 어렵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근본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Q. 당신의 작가적 포지션 혹은 계보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혹은 그런 부분은 개의치 않는 편인가요?

A. 제 작업이 어떤 계보에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중성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의 경우, ‘중성적인 것’은 무겁지 않은 동경의 대상입니다. 어렸을 때 같은 반 남학생들이 하는 놀이가 더 재미있어 보여서 같이 놀고 싶은 것처럼요. 뭔가 게임적인 요소가 있거나, 단순히 재미있는 놀이가 많다고 느꼈어요. 진지한데 바보 같이 놀아서 좋았고. 반대로 소꿉놀이를 계속해주는 남학생도 있었어요. 꽤 친했고 재미있게 놀았어요. 그러고 보면 저는 재미있었던 일을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네요. 고정된 성 역할과 상관없이 가고 싶고, 맞서 나가는 것과 흐름에 맡기는 것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과도한 고민 없이 새로운 위치를 개척하고 싶습니다.


Q. 홈페이지가 인상적입니다. 직접 만들었나요? 00년대 홈페이지 같은 레트로함이 재밌고, 작은 아카이브이자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이런 식의 홈페이지를 만드는 사람이 적어요. 일본에는 여전히 많은가요? 작품 속 ‘잊혀진 홈페이지의 바다’라는 말을 보았는데, 어떤 경험에서 나온 문장인가 궁금했습니다.

A. 웹페이지 ‘좀비에비’는 제가 브라우저로 전부 만든 겁니다. 그런 스타일의 홈페이지를 꼼꼼히 만든다는 것이 시대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그냥 좋아서 하는 겁니다. 홈페이지는 하고 싶은 대로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 소중히 생각하고 있어요. 2010년경까지는 블로그를 변형해서 만든 다른 홈페이지가 있었고, 지금은 없지만, 예전에 폴더폰으로 만든 적도 있어요. 2005~8년쯤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휴대폰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 사이트나 일러스트 사이트를 자주 방문했어요. 그중 마음에 든 페이지를 매일 둘러보면서 업데이트된 걸 즐겨 봤어요. 그러다가 점차 사이트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죠. 슬펐습니다. 당시 10대였던 제게는 강력하게 각인된 체험이었는데, 사라지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어요. 어떻게 된 일일까 생각하다가 ‘잊혀진 홈페이지의 바다’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좀비에비, 그린 그림, 만화, 그리고 나도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보이지 않는 아카이브같은 곳에 축적되지 않겠냐고 마음대로 떠올린 생각입니다.

Q. 홈페이지에 만화책이 ‘매거진’이라는 이름으로 올라가 있어요. 잡지라 생각하신다면, 이유가 궁금해요. 저는 각각의 책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책의 한 챕터들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A. 사실 매거진이 아니라, ‘망가(MANGA)’+‘진(ZINE)’이라는 뜻에서, 스스로 만든 말이에요. 헷갈리실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사실 내용에 일관성이 없고 잡다한 지면이라 혼자 만든 잡지로 볼 수도 있겠네요. 완성되지 않은 챕터라는 말이 흥미로워요. 책은 매년 출간하는데, 매번 사이에 텀이 생기니까, 책 하나하나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요. 항상 그전에 나온 책과 다른 시도를 해보려 해요.

Q.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뭘 하나요? 취미는?

A. 최근에 집에서 애니메이션 동영상을 만들고 있어요. 가끔 컴퓨터 게임도 하지만… 취미다운 취미가 없네요. 있어도 하고 안 하고를 반복하다가 금방 재미가 없어져요. 취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Q. 어릴 적 플레이하고 봐온 게임과 만화가 당신의 작품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나요? 때로, 유명한 캐릭터 같은 등장인물이 보일 때도 있고, 살짝 변형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만화 속 세계가 아주 넓다가도 누군가의 머리 속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보편적 경험 같다가 특수한 경험 같기도 한 감각을 줍니다.

A. 어릴 때(90년대 후반)는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과 게임보이를 하고 자랐어요. 게임 속 세계도 영원히 이어지지 않고, 작고 큰 모형의 정원 안에서 롤플레잉을 하죠. 그런 경험을 제공해주거나 보이지 않는 바다 너머를 바라보는 것과 같이, 세계 자체의 변두리를 연상시키는 게임을 좋아합니다. 그건 시스템 구조나 세계관 등 다양할 텐데요. 마음이 설레는 이미지는 모두가 다 공통으로 갖고 있지 않을까요. 또한 저는 캐릭터와 물건/오브젝트의 좋은 디테일에 매료되는 편이에요. 그중 어떤 하나가 영향을 미쳤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출처가 너무 많아요. 조촐하게 물건을 모으고 육성하고 캐릭터를 레벨 업하는 등 게임의 수수한 점을 좋아해요. 참고로 지금 다시 플레이하는 게임은 «여길 파라! 푸카(ここ掘れ!プッカ)»라는 플레이스테이션 1 시절의 게임인데요, ‘푸카’라는 쥐 캐릭터를 통해서 우주의 여러 행성으로 흩어진 우주석이라는 광석을 채굴하는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게임 중의 하나예요.


Q. 당신의 작품이 작가가 느끼는 삶 일부의 기록과 판타지의 결합이라고 한다면, 과거에 만든 세계관에 다시 돌아가 2편을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마치 저장한 게임을 불러오기 해서 또다시 플레이하면 다른 경험이 가능한 것처럼)

A. 완벽하게 동일하지 않겠지만, 이어서 플레이해 볼 생각이 있습니다. 2편을 만들어도 재미있겠네요. 이미지가 다양하게 떠오릅니다.

Q. 한국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A. 이야기를 이것저것 늘어놓았지만, 편하게 만화를 읽어주셨으면 좋겠네요. 읽는 경험을 통해 느낀 게 전부라고 생각해요. 후에 바이러스가 잠잠해지면, 한국을 꼭 방문하고 싶어요. 그때까지 모든 분의 몸과 마음 건강하시길 진심으로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