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방과후의 2018년의 연말 기획 «수호랑★반다비의 선물» 프로그램에서 나는(강정석) ‹플레이어를 디자인하는 법›과, ‹플레이어의 이해› 두 강의를 했다. 전자의 경우 잡지 «매거진 beta 1호»에 비슷한 내용을 글로 적었다. 한편, 어찌저찌 살다 보니 ‹플레이어의 이해›에 대해선 잊어버렸다. 잊어버렸음을 눈치챈 것도 이미 한참 전이지만, 제목에서 말하는 플레이어는 누구고 뭐를 이해한다는 건지 기억해 내려면 시간이 좀 들 것 같았다.
강의 소개엔 내가 2012~2016년 사이 운영한 비디오 페스티벌 «비디오 릴레이 탄산»(Video Relay TAANSAN, 이하 탄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고 쓰여있다. 그 외에는 “작가와 작가가 생성한 ‘작품’이라는 상태를 이해하고, 이를 수용하는 행위에서 행사, 혹은 전시를 기획하는 방법을 다룹니다.”라는 설명도 있다. 정말 그래? 혼잣말하며 찾아보니, 강의와 동명의 문서 파일이 구글 드라이브에 있었다. 첫 줄에는 작가인데 기획도 하려는 경우, 소위 ‘작가형 기획자’에 적합한 강의라는 점을 수강생에게 안내하라는 내용이 있다. 문서 파일엔 이와 같이 메모들이 적혀 있는데, 한 페이지 남짓이다. 글의 제목이 ‘기록: 강의 ‹플레이어의 이해›’지만, 별도의 강의 기록은 없다. 메모를 들여다보니 그래도 큰 틀은 기억난다. 주요한 부분만이라도 적어두려고 한다.
«탄산»은 릴레이 형식으로 진행한 비디오 페스티벌이다. 주로 미술가의 영상 작품을 상영했다. ‘릴레이’라는 건 내가 즐겨 보던 영화잡지 «씨네21»에서 간혹 마주쳤던 단어다. 잡지에서 그런 단어를 만나면 보통 행사는 다 끝나있어서 가보진 못했지만, 감독에서 감독으로, 비평가에서 비평가로 이어지는 그런 행사로 이해했다. 내가 활동했던 미술 쪽에서도 그런 게 있다면 재밌겠다고 생각했고, «탄산»을 만들었다. 큰 틀에서 보면 «탄산»은 아래와 같은 행사다.
- 매년 열었다. 2012년이 1회이고 2016년 5회로 종료했다.
- 각 회차의 상영 작가는 5명~10명 정도로, 여러 날에 나누어 상영한다.
- 프로그램은 이전 회차의 상영 작가가 다음 회차의 작가를 초대하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 작품 상영은 가능한 제작 연대순으로 진행한다. 작품 상영 후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다.
- 휴식 후엔 창작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레퍼런스를 함께 상영한다. 영상으로 상영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필요에 따라 PPT 프리젠테이션이나 이미지 슬라이드 쇼 등의 형태로 구성할 수 있다.
- 마지막으로 작가와의 대화 및 관객 질의응답 시간을 진행한다.
«탄산» 첫 회차는 다소 정신없이 진행되었다. 주변에 좋은 작업을 상영할 기회가 없어 하드디스크에 묵혀둔 이들이 있었고, 그걸 꺼내어 상영의 자리로 데려오는 게 첫 번째 목표였다. 첫 회차 상영 작가는 총 5명인데, 이들 모두 아는 사이는 아니었고, 소개를 통해 알게 된 작가도 있다. 이듬해 봄에 1회차 참여작가로부터 «탄산» 2회차 작가를 추천하는 연락이 왔다. 그제야 릴레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와 닿았다.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면 작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처음엔 이게 낯설었고 쉽지 않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장점이 컸다. 개별 작품의 질이나 행사의 주제는 상관없다. 그저 작업을 둘러싼 시간을 이해하기 위한 대화에 돌입해야 한다. 대화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할만한 재미 요소를 찾아낸다. ‹플레이어의 이해› 강의 메모엔 이 행사에서 내가 목표로 삼은 것을 요약하는 문장이 하나 있다:
작가의 시간에 도착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작가’는 상영회에 작품을 제공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쓰지만, 예술 창작의 특성상 그 시간이 금전적으로 보상받기는 어렵다. 대개 작가는 그런 경제적 불확실함을 감수하고 창작을 이어 온 사람들이다. 나는 ‘돈도 안 되는데 왜 이런 걸 만들었어요?’라고 묻곤 했다. 한편, ‘작가의 시간에 도착해야 한다’라는 말은 나와 관객에 해당하는 말이다. 먼저 «탄산»을 운영하는 내가 그 시간에 도착하고, 나와 작가들이 힘을 합쳐 관객 또한 그 시간에 도착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럼 ‘작가의 시간’이 뭔가? 나 혼자 쓰는 말이니 모호하게 들리는 건 당연하다. 이 말을 풀어서 말한다면, 그건 결국 ‘작업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엿보이는 어떤 시간이다. 좀 쑥스러운데, 그냥 창작의 과정에서 작가가 들어서게 되는 시간을 거창하게 표현한 거다.
독일어라든가 어딘가에 그 시간을 설명할 다른 단어가 분명 있을 테지만, 어차피 그 단어도 부연 설명이 필요한 단어일 게 분명하다. 그러니 그냥 이어서 설명해 보겠다. 지난한 창작의 과정에서 아주 잠깐 열리는 순간이 있다. 밀도 높지만 다 끝나고 돌아보면 정말 짧은 시간이다.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라는 상황’이 있다. 작업이라는 상황은 작가의 환경이 되고, 자신의 제약과 조건을 작가에 부과한다. 작가는 대체로 이런 상황에 대처할 방법이 있거나 그런 방법을 찾아 헤매는 일을 즐긴다. 상황이 만든 제약이 있을 테고, 그에 맞추어 이런저런 일들을 하다 보면, 작업과 작가가 쌍방을 정의하는 순간에 돌입한다. 이때부터가 작가의 시간이라 할 법한 것인데, 이 시간은 나중에 관객이 진입할 수 있는 어떤 장소가 된다.
잠시 짚어두자면 난 카메라와 렌즈로 촬영해 소셜 미디어로 공유할 수 있는 ‘창작 과정’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럼, 뭘 말하는 건가? 솔직히 말해 점점 설명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그래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더 적는다. 처음엔 어떤 대상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주변을 더듬어 잠재적인 연결들과 만나다가, 어느 순간 개인적인 기억과 사변을 통해 엉뚱한 지점으로 튕겨나 새로이 헤매이는 시간. 그 엉뚱한 지점에서 언제부터인가 알게 모르게 진행됐던 흐름을 만나고, 이들을 통해 기존의 관계들을 재맥락화하고···. 이런 식으로 끝도 없이 부연할 수 있는 시간. 온갖 일을 통과해야 하는 순간들을 단축해서 ‘작가의 시간’이라 적은 거다.
작가가 그 시간에서 보는 것들이 관객을 위한 장소로 변화할 때, 모든 것이 온전히 전시장이나 스크린에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들은 그 시간 속에서만 산다. 만약 어설프게 다루면 그냥 ‘전시용 콘텐츠’ 같은 걸 만들어내고야 만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최종 작품에 작가의 시간으로 관객을 유도하는 진입로 같은 것이 담길 수 있는데, 꽤 어려운 일이다. 나 자신도 그런 걸 잘 해낸 사람이라고 말할 주제는 아니다. 결국 우리가 만나는 작품들에 그런 진입로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라면 내가 말한 ‘작가의 시간’에 대한 경험은 무조건 있다. 작품이 질적으로 어떻든 간에, 미완성일 때에도, 창작자는 특정 작품과 연관한 그 시간을 알기 위한 신뢰할 만한 가이드가 되어줄 수 있다.
말이 길었지만, 이게 ‘작가의 시간’에 관련한 메모 한 줄에 관한 내용이다. 나는 그 시간에 도착하는 게 «탄산»이란 행사의 주요 목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게 된다면 내 기준에선 «탄산»이란 행사는 성공한 거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관객이 얼마나 왔는지보다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난 작업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작업 이야기의 핵심은 ‘작가의 시간’에 도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우린 ‘플레이어’를 이해할 수 있다.
무슨 이야기인가? 나는 작가라는 사람들이 뭘 하는 인간인지 관객과 공유하고 싶었다. 좋든 싫든, 대부분의 전시와 행사가 유통하는 것은 ‘작가의 시간’ 같은 게 아니다. 전시 부대행사인 ‘토크’ 자리에서도 그런 걸 다루기 어렵고, 대체로는 어떤 철학 용어들이 왔다 갔다 하느라 부산하기 쉽다. 내 경험상 작업 이야기는 공적인 자리에서 놀랍게도 적게 일어난다. 그나마 쉬운 접근법은 작가의 작업실에 자주 들르는 것이지만, 누가 그럴 수 있을까? 당신이 동료 작가가 아니라면 더욱 어렵다.
그래서 상영회를 운영하는 건 내게 좋은 핑계였다. 상영회를 빌미로 작업을 본다. 작업 노트, 예전 작업, 실패들, 작업에 끼어든 영향, 영상 편집 창의 타임라인, 최근 본 드라마 등, 작업의 질적인 평가와 벗어난 대화를 연속해 나간다면 대체로 작가의 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 작가의 시간을 거쳐 나타난 결과물은 우리 모두가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과정 중이거나 실패한 작업은 시시한 게 아니라 다음의 시간을 그려볼 수 있는 중간 거점이다. 성공적으로 유통될 법한 미술 콘텐츠를 만들었는지, 작품이 팔리는지 아닌지 이전에 예술 행위가 존재한다는 걸 정말 이해한다면 관객에게 그 행위가 가진 가치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의 시간이 관객에게 도착할 때, 플레이어의 이해를 기반으로 한 무언가가 시작될 수 있다. 별생각 없이 지나친 작업의 결과물이 작가의 시간을 이해함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이게 되는 일은 신기한 경험이다. «탄산»이 작품 외에 레퍼런스를 상영하거나, ‘돈도 안 되는데 왜 이런 걸 만들었어요?’라고 대화를 시작했던 건 그런 이유에서다.
물론, 솔직히 말해 작가에겐 보통 기획 같은 걸 할 시간도 돈도 없다. 또 기획하는 게 꼭 자기 작업에 직접적으로 도움 되리란 법도 없다. 고생스럽고, 재수 없으면 빚이 늘어난다.
그래도 장점이 있다. 메모엔 이런 말이 적혀있다:
작가형 기획자는 없는 직종. 동인 활동. 하지만 누구나 작가형 기획자라는 정체성을 개발해 나갈 수 있음. 자신이 움직이는 방식을, 타인을 통해 재구성하고, 그를 통해 타인 또한 재구성되는 장이 생성되는 느낌.
시간이 지나 이 글을 쓰면서 할 수 있는 충고를 하나 더 추가로 적어둔다:
한편 정말 주의해야 하는 점은, 작가의 시간에 도착한 후로 그 모든 게, 마치 자기 일이나 자신의 작업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정말 그런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시간에서 얻은 신뢰를 토큰으로 활용해 기획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전부 써서 없애버리고, 푹 자고 일어나 자신의 작업으로 돌아가라.
당신이 이걸 보고 혹은 보지 않았더라도, 플레이어의 이해를 기반한 기획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면, 장담컨대 참가자들은 당신의 기획에 재방문하고 자신의 소식을 새롭게 업데이트하기 시작할 것이다. 관계망이 구성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업데이트도 생긴다. 담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도가 그려지고, 그 위에서 작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것이다. 서로의 공통분모와 고민은 플레이어 간의 공유지를 발견하거나 이에 대해 질문하게 하며, 다른 기획과 모임을 발생시킨다.
장황한 설명이지만 일 자체는 쉽다. 실행이 버거울 뿐이다. 그렇지만 다 좋은 경험이 될 거다. ‘뭐야, 나도 해볼 수 있겠는걸?’ 그러한 정도가 작가형 기획에 딱 좋다. 작은 행사라도, 작동이 된다면, 사람들은 연결되고, 활동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행운을 빈다!


